【건강다이제스트 | 이정희 기자】
‘유산균’ 하면 러시아의 메치니코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어떨까? 유산균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1980년대 말부터 유산균을 이용한 한국인의 장 건강을 연구한 학자가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산균 연구로 20년 넘게 외길을 걸어온 사람. 바로 서울대 식품영양학과 지근억 교수(55세)다. 특히 비피더스균 연구로 한국을 넘어 이제 세계적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그토록 유산균 연구에 매진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유산균의 비밀과 건강한 장 유지법이 궁금해진다. ?
과민한 장 때문에 괴로운 나날들…
한 소년이 있었다. 집이 가난해서 먹을 것이 부족했다. 영양부족으로 야맹증을 달고 살았다. 툭하면 입이 헐고, 감기에 걸렸다. 자주 아파 책상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었다. 어느 날 결핵에 걸렸다. 먹고 살기 어려운 후진국 병으로 불리는 결핵. 2~3년간 약을 먹으니 위가 나빠졌다. 위가 쓰리고 장이 자주 탈이 나 툭하면 화장실에 들락거렸다. 그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는 또다시 증상을 악화시켰다. 바로 지근억 교수의 이야기다.
지근억 교수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저 자신이 아프다보니 더 절실하게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과민한 장 증상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만 해도 300만 명이나 되기 때문에 개선 방안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지근억 교수가 본격적으로 유산균 연구를 시작한 것은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미생물학 박사과정을 밟던 때다. 사람의 장에는 500조, 무게는 1kg이나 되는 미생물이 있다. 이렇게 장 세균의 양이 많은 데도 이에 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인의 장에는 어떤 세균이 있는지, 좋은 균과 나쁜 균은 무엇인지 연구에 돌입했다.
비피더스균의 효과를 밝혀내
현대인의 장은 불규칙한 식생활, 스트레스, 운동 부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균의 균형이 깨져 위협받고 있다. 사람의 장에 유익한 균이 비피더스균이라는 것을 밝히고, 활성화 할 수 있는 방법에 매진했다.
그 결과 2001년, 인체에 유익한 비피더스균에 원하는 유전자를 심어 체내에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화제를 모았다. 일본의 교토대와 이탈리아의 볼로냐대 등에서 같은 연구를 진행 중이었지만 지근억 교수가 가장 먼저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이 기술은 질병 치료 유전자를 넣은 비피더스균이 장에 정착해 변비, 대장암 등 장 관련 질환 치료에 이용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한국인의 장에서 분리한 비피더스균을 이용한 정장용 요구르트, 생균 유산균 제품 개발도 이뤄냈다.
2006년엔 삼성서울병원과 함께 비피더스균이 아토피피부염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아토피 소인이 있는 임신부들에게 비피더스균을 먹였더니 아이들의 아토피 발생률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이어서 서울대병원과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에서는 과민성 장 증상과 배변 시 통증 감소 효과도 입증했다. 세브란스병원과 진행한 임상연구에서는 소아 장염의 가장 큰 원인인 로타바이러스 장염에 걸린 아기들의 치료기간을 절반으로 앞당겼다. 이 연구 성과로 과학기술부에서 신기술인증제도인 KT마크를 획득했다.
사실 의학계에서 식품을 통해 치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의 연구에 대한 관심과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이런 연구들은 모두 병원 측의 요구로 진행됐다.
“제가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해외에서 추출한 유산균과 비피더스균을 수입해 사용했습니다. 그 사실은 제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한국인의 몸에는 맞지 않거든요. 그래서 우리 몸에 맞는, 제대로 된 발효식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개발을 하게 됐습니다. 실제로 제가 개발한 비피더스균으로 증상이 낫는 것을 보며 한국의 식품영양학자로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150여 편의 국내외 학술 논문을 발표했고, 40여 건의 특허를 등록했다. 1999년에는 제자들과 함께 학내 벤처를 창업해 연구결과를 제품으로도 적용해 오고 있다.
꾸준한 유산균 섭취로 장이 튼튼해져
어렸을 때부터 약골이었던 지근억 교수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식사 후에 유산균을 매일매일 섭취하면서 가장 문제였던 과민한 장 증상이 개선됐다. 예전엔 아침마다 화장실을 여러 번 들락거렸지만 이제 그런 걱정은 없다. 균형 잡힌 식사로 야맹증도 없어지고, 입이 헐어 고생하지도 않는다. 20~30대 초반까지는 잘 아팠던 몸이지만 그 후로는 동년배들보다 건강한 편이다. 10년 전, 그는 40대 몸으로 20대인 제자들과 함께 한 단합대회에서 약식 철인경기에 출전했다. 자전거로 20km, 마라톤 20km, 산을 넘고 길을 달려 50명 중 2등으로 골인했다. 체력이 약하던 젊은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는 지금도 건강관리를 꼼꼼히 하는 편이다. “살다보니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약한 사람도 튼튼해질 수 있고, 튼튼한 사람도 건강을 잃을 수 있다.”며 꾸준한 건강관리를 당부한다. 안 아파 본 사람들이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고 관리하지 않다가 크게 앓는 경우를 많이 봤다. 건강해야 일도 하고, 즐기기도 하는 법이다.
지근억 교수는 유산균 섭취 외에도 식생활 관리에 신경을 쓴다. 편식하지 않고 두루두루 균형 있게 먹지만, 육식보다는 채소와 과일을 비중 있게 먹는다. 회식할 때 고기를 많이 먹었다면 다음날 채소를 많이 먹으며 음식의 균형을 조절한다. 위에 부담이 가는 짜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은 되도록 피한다. 술은 술자리의 즐거움을 위해 마시긴 하지만, 반병을 넘지 않는다.
그는 연구와 후학 양성, 신기술 개발로 늘 바쁘지만 몸도 마음도 즐겁다. 몸이 건강하니 바빠도 쉽게 지치지 않는다. 워낙 성격이 밝고 낙천적이라며 웃는다. “매일 즐겁다보니 어쩔 땐 오늘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건강에 보탬이 되는 연구와 실용화에 매진하면서, 앞으로도 지금처럼 즐겁게 살 겁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그의 즐거운 도전을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