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서울메디칼랩 김형일 의학박사】
거의 모든 영양제와 보약에는 빠짐없이 ‘혈액순환 개선’이라는 명목이 들어가 있다. 정말 세상에 있는 질병들이 혈액순환 장애 때문에 그렇게 많이 생기는 것일까?
지난 봄에 운수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셨다. 그 할아버지는 이북에서 월남하여 처음엔 고물상부터 시작하여, 다음엔 작은 용달업을 하다가 사업을 점점 키워서 큰 운수회사 사장님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간 억척스럽게 살면서 여기저기가 아프기도 했지만 절대 병원에 가는 일이 없었다. 상처 나면 고약 붙이고, 감기 들면 쌍화탕 먹고 땀 빼고, 기운 없으면 영양제 맞고, 머리 아프면 두통약 먹고…. 그러다가 요새는 여기저기가 다 아픈데 그것은 혈액순환장애 때문인 것 같았다. TV에서 광고하는 좋다는 혈액순환 개선제를 두어 가지 사서 열심히 먹었다. 좀 덜한 것 같기도 하더니 얼마 후 또 마찬가지였다.
진찰 결과 그 분은 당뇨병과 통풍이 이미 오래 전부터 와 있었다. 그 부작용으로 신경장애가 와서 말단의 감각신경이 이미 둔화되어 있었고, 시력·청력도 떨어지고 벌써 그 후유증이 전신에 퍼져 있었다. 그 분은 큰 병원에 입원하여 적극 치료하였으나 일 년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물론 당뇨병도 혈액순환장애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혈압이든, 지방간이든, 관절염이든, 갑상샘질환이든, 성기능장애든… 그 무슨 병인들 혈액순환장애라고 진단 못 내릴 병이 어디에 따로 있겠는가!
손발이 차거나 저려도 혈액순환장애니 약 먹어 보시오, 어깨가 쑤시고 목이 뻣뻣해도 혈액순환장애니 약 먹으시오, 기억력이나 성기능이 떨어져도 혈액순환장애요, 시력이나 청력이 떨어져도, 배가 차고 아파도 혈액순환장애요… 이것은 정말 한심할 노릇이다.
요새 혈액순환장애가 전혀 없다거나 더 적어졌다는 주장은 절대 아니다. 최근에는 혈관이 막혀서 그 이하 장기가 괴사되는 고셔병(Gaucher’s disease)이 훨씬 더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혈액순환장애라기보다는 흡연이나 인공화합물에 의한 혈관수축의 반복과 지속적인 혈류량 감소가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자기 혈관이 막힌 줄 모르고, 이약 저약을 오랫동안 남용하다가 뒤늦게야 그것이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신체 성분 과부족 현상은 혈핵순환 개선제로 치료되지 않으며, CT나 MRI로도 진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증상이든지 혈액순환장애라고 두루뭉술 진단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치료표적으로 봐서는 안 될 일이며 반드시 그 원인질환을 먼저 찾고 나서 그에 맞는 치료방법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