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이은혜 기자】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최고의 항암제입니다”
“나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첫마디다. 지금도 3개월에 한 번씩 꼭꼭 병원에 가서 정기검진을 받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조금 의외다. “암 덕분에 무슨 일이든지 좋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지금의 그에게는 세상사 모든 일이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일들뿐이다. 걱정이 되고 고민이 되지 못한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던 이태석 씨(67세). 그것은 마른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았다. 왜 걸렸는지 이유도 모른 채 절망했다.
그랬던 그가 오늘은 말한다. 그때의 그 절망과 원망은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됐다고. 그런 그가 털어놓는 폐암 진단, 그리고 그 후 8년 세월에 묻어있는 이야기를 들어본다.
2002년 6월 24일의 악몽
그날은 당뇨 합병증을 검사하는 날이었다. 40대부터 앓기 시작한 당뇨는 이태석 씨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당뇨 수치가 150을 넘어섰지만 방치해둔 상태로 10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십을 넘어서면서 당뇨 수치는 점점 올라가 200~280을 오르내렸다. 설상가상 매스컴에서는 당뇨 합병증의 무서움을 알리면서 겁을 주었다. 안 되겠다 싶었다. 이때부터 하루 한 알 당뇨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일 년에 한 번씩 당뇨 합병증 체크도 시작했다. 그렇게 해온 지 5년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2002년 3월의 일이다.
그날도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당뇨 합병증을 검사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검사를 마친 담당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폐에 뭐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혹시 폐렴일지도 모르니까 3개월 정도 두고 보자.”고 했다.
3개월이 지나 다시 검사를 했다. 그런데 의사의 말이 심상찮다.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러고 나서 한 말은 기가 찼다. 폐암이라고 했다. 그것도 4기 폐암이라고 했다.
“왜 내가 폐암에 걸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담배를 그리 많이 피우는 편도 아니었고, 마땅히 폐를 나쁘게 할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었으니까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국립암센터에 가서 재검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돌이킬 수 없는 폐암 4기였다. 의사는 말했다. 수술보다는 항암치료를 하는 것이 낫겠다고.
‘말기라서 수술도 못하는가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뚝 멎었다. 들리는 것이라곤 오로지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의 숨소리뿐이었다. 의사가 등 뒤에다 대고 뭐라고 말을 했지만 그는 조용히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숱한 사람들이 오고가는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두 눈을 꼭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병원 복도에 오고가는 사람이 뜸해질 무렵 이태석 씨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했다.?
‘고치면 되지 뭐! 하나님이 고쳐주실 거야!’
그것은 2002년 6월 24일, 이태석 씨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59세였다.
‘고치면 되지 뭐!’ 그래도 투병은 힘들어
‘고치면 되지 뭐!’
폐암 4기라는 진단을 받고 이태석 씨가 가장 먼저 마음에 새긴 말이었지만 문득문득 파고드는 불안감은 참으로 털어내기 힘든 것이었다. 기가 막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식들이었다. 다행히 딸 둘은 결혼을 시킨 상태였지만 하나 남은 아들이 못내 걸렸다. 결혼식날 아내 혼자 쓸쓸히 앉아 눈물짓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왔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고치면 되지 뭐!’
병원에서 권한 대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피를 말렸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들의 피까지도 말렸다.
“일단 음식을 못 먹으니까 팔 하나 들 힘도 없어지면서 삶의 의욕까지 꺾어버리더군요. 그러다보니 우울증까지 엄습하면서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어요. 하루에도 열두 번 ‘이렇게 살아 무엇 하나?’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면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으니까요.”
이런 그에게 가족들의 헌신적인 사랑은 큰 힘이 됐다고 말한다. 아내의 지극 정성은 눈물겨웠다. 어디서 듣고 왔는지 암 환자에게 좋다며 민물잉어를 고기 시작했고, 상황버섯을 달여 수시로 먹도록 했다. 암에 좋다고 하면 열일 제쳐두고 매달렸다.
그러나 폐암 4기에는 그런 정성도 잘 통하지 않았다. 고생고생해가며 6번의 항암치료가 끝나고 CT를 찍어본 결과 몸 상태는 더 나빠져 있었다.
“담당의사는 다시 항암치료를 하자고 하더군요. 하지만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었어요. 암세포보다 제가 먼저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요.”
결국 더 이상의 항암치료는 포기했다. “그때의 제 생각으로는 그냥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사는 날까지 살다가 생을 마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치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폐암 4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어요.”
비로소 폐암 4기의 위력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조금 힘들지 모른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 힘든 항암치료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담당의사가 주저하면서 소개해 준 것이 있었다.
“이레사였어요. 그 당시 막 개발되어 한창 임상시험 중이었는데 의사가 솔직히 말하더군요. 이 약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고, 또 환자에게 직접 써본 경험도 없다고.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이 최선책이라면서 임상시험에 한 번 참가해보라고 권하더군요.”
이것저것 따질 처지도 아니었던 이태석 씨. 이레사의 임상시험에 참가했다. 2002년 9월부터 하루 한 알씩 이레사를 복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레사 임상시험에 참가하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태석 씨. 이레사를 열심히 복용하면서 이때부터 그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 일이 있었다. 등산이었다. 하루 일과처럼 늘 산에 올랐다. 서울 근교의 수락산과 도봉산은 그에게 좋은 친구가 돼 주었다.
등산을 다녀오면 성경책을 읽었다. 마음속에 잡념이 떠오르지 않도록 읽고 또 읽었다. 마음이 불안하거나 절망적인 생각이 들 때 성경책은 많은 위로가 돼 주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흐르고 세 달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독한 항암치료로 잃었던 입맛이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체중도 조금 늘었다. 피곤한 증상도 많이 가셨다. 살맛이 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궁금했다. ‘혹시 좋아졌나?’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주던 의사는 별로 말이 없었다. ‘고만고만하다’고만 했다. 잠깐 실망스러웠지만 생각을 바로 바꿨다.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은 게 어디야?’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게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하루 한 알 이레사는 늘 복용하고 등산을 갔다오면 성경책을 읽는 일과도 변함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체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2003년 11월, 그 날도 정기검진날이었다. 그런데 검사를 마친 의사가 불쑥 말했다. “내년에나 봅시다.” 이태석 씨는 그 날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한 달은 건너뛰어도 된다는 의미였어요. ‘이제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더군요.”
다시금 부르는 희망의 노래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0년 1월 현재 이태석 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도 이레사를 하루 한 알씩 먹고 있고, 3개월에 한 번씩은 병원에 들릅니다. 검사를 마친 의사에게 상태를 물어보면 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고만고만하다.’고.”
하지만 이태석 씨는 알고 있다. 그 말속에 숨은 뜻을. 그것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 알게 된 사실이기도 했다.
“2007년도에 TV건강프로인 ‘생로병사’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 2004년도 폐 사진과 2007년도 폐 사진을 비교해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2004년도 사진에는 선명하게 보이던 폐암 흔적이 2007년 사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의사에게 물어봤다. 완쾌된 거냐고?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만약 자식이 학교에서 100점 받아왔다고 해서 덮어놓고 잘했다고 칭찬만 하시겠어요? 아니면 반 학생이 몇 명이고, 그 중에서 100점 맞은 학생은 또 몇 명인지 이것저것 따져보시겠어요? 지금 당장 좋아졌다고 해서 나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루하루 잘 지내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 말은 이태석 씨에게 금과옥조와도 같다. 보루처럼 여기며 산다. 암이라는 건 다 나았다가도 언제 다시 고개를 내밀지 모른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치’라는 개념을 잊어버리고 산 지 오래다. 그저 오늘 하루 열심히 살 수 있음에 만족한다.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새벽 기도를 하고, 아침 8시면 소일거리로 시작한 두유대리점에서 땀 흘리며 일한다.
그런 그에게서 폐암 환자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활기차고 강인해 보인다. 당뇨 때문에 인슐린 주사도 늘 맞아야 하지만 언제나 자신은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병은 누구든지 걸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해? 억울해! 원망만 하고 있어서는 결코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원망 대신 긍정의 힘을 믿는다고 말하는 이태석 씨. 살 수 있다는 긍정의 힘, 불행도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당장의 불행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갖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웃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웃고, 불행한 생각이 들면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라고 주문한다. 그것이 암을 이기는 최고의 항암제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태석 씨의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생활 속으로…
암을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얼 먹고 또 어떻게 생활할까? 아마 모두의 관심사일 것이다. 이태석 씨는 어떨까?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지만 그런 건 없다.”는 게 그의 답변. 그런 그가 소개하는 일상은 결코 유별나지 않다. 몇 가지 원칙만 있을 뿐이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늘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2.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3. 늘 웃으면서 살려고 노력한다.
4. 암 덕분에 삶이 더 충만해졌다고 생각한다.
5. 된장이나 고추장은 직접 담가 먹는다.
6. 덜 맵게, 덜 짜게 신선한 것 위주로 먹는다.
7. 기름에 튀긴 음식은 되도록 피한다.
8. 화학조미료 대신 멸치와 새우, 다시마 등을 조미료 대신 쓴다.
9. 민들레 + 버섯 3가지 + 녹차+ 둥굴레를 푹 끓여서 물처럼 늘 마신다.
10. 육류는 가급적 피한다.